- 민속 문화 - - 무형문화 - - 공산주의 문화 - - 세계 자연 유산 -

  1936년 5월 5일, 허룽과 샤우크의 지휘 아래 홍군 제2 군단과 제6 군단은 중뎬, 즉 샹그릴라로 진입하여 길을 따라 해방의 복음을 전파하고 홍색 혁명의 불씨를 심었다.운남 적경주 덕흠현 동죽림"물가"의 활불들은이 소문을 듣고 즉시 더룽현 아촌군단 등을 불러 집회를 갖고 홍군의 북상을 어떻게 저격할 것인가를 연구했다.아촌군은 명령을 받은후 즉시 자경향일대에서 170여명의 병사를 모집하고 자나야산입구에 매복해놓고 홍군이 오기를 기다렸다.홍군 제2 군단 제4 사단 선두부대는 윈난 방향 차오터우 (橋头) 변에'랴오자안 (랴오자안)'이라는 이름의 사람이 꽂아 놓은 목패를 보았다. 거기에는'홍군 장교, 차오터우 촌으로 올라가다.상교두촌 이내의 운남 경계에는 토비들이 매복해 습격하지 않는다.제4 사단 참모장 탕푸린 (唐福林)은 홍군을 자세히 본 뒤 주변 지형을 둘러보며"이 소박한 말은 홍군에 대한 충성심이다.동지들, 정보에 따르면 맞은편 산에 좀도적들이 있는데 지세가 우월한 점을 리용하여 우리를 매복습격하려 합니다. 즉시 전투준비를 갖추십시오!"
  산에 호랑이가 있는 줄 뻔히 알면서도, 기어코 산으로 가다.붉은 군대 장병들은 험준한 산길을 따라 자나야 (zanaka) 산으로 향했다.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홍군전사들은 등반하면서 큰소리로 함성을 질러 홍군이 길을 통해 북상하는 정책을 선전하고 설명하였다.자나야산입구에 매복해있던 아촌군은 우리 선두부대를 향해 총을 쏘고 큰 바위를 굴리라는 명령을 내렸다.3명의 홍군전사가 당장에서 희생되였다.이 광경을 본 제4 사 참모장 탕복림은 즉시 반격을 명령하였으나 불행히도 전투에 뛰여들 때 총탄에 맞아 희생되였다.지금 홍군 전사 분노, 기관총과 소총 사격을 동시에 수류탄 FeiYu처럼 던지, 적군은 높은 곳의 우세와 들끓다 熖 순식간에 사라 지는:두목아 마을들은 몸에서 세 탄 자리에서 사망하였다, 그에게다 참전 한 대중 즉각 철수와 무기 투항하였고 홍군 전사들을 점령하였 자나야 야마구치으로 군대를 지휘 하여 북상하다. 장애를 제거 했다.격전이 끝난후 하룡원수는 안부침구에 서서 량안의 험준한 산과 물살 빠른 금사강을 바라보면서 홍군의 장정의 험난함을 생각하고 량안의 백성들이 금사강을 비행으로 건너가기 어렵다고 생각하여 항일전쟁 승리후 반드시 이곳에 다리를 건설하여 백성들의 행복을 마련해주겠다고 결심하였다.
  1959년 이곳을 지나는 허룽 원수와 희생된 홍군 전사들을 기념하고 양안 인민들이 작은 목선에 의지해 강을 건너야 하는 교통난을 철저히 해결하기 위해 병참부대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금사강을 가로지르고 윈난 · 촨과 두 성을 연결하는 허룽교가 건설되었다.
  이는 철삭널판자위에 설치한 현수교로서 총길이가 108 메터이고 너비가 5.6 메터이며 적재한도가 10톤으로서 당시 디칭경내에서 금사강을 가로지나는 첫 대교였다.이 교량은 사장식 철삭현수교로서 8호 철사를 꼬아서 만든 철삭을 량안의 튼튼한 석축에 고정하였다.소탑은 높이가 5.5 메터이고 돌과 콘크리트로 건설되였다.다리에서 서쪽으로 5 메터 되는 곳에 기념비가 세워져있는데 남북길이가 2.12 메터, 동서너비가 1.15 메터, 높이가 4.5 메터이다.비석 상부의 여덟 글자는'홍군열사영생불멸'이다.근 60년의 비바람을 겪었지만이 옛 다리는 여전히 량안의 백성들에게 복을 마련해주고있다.이 도로는 장정길에서 잊을수 없는 한단면의 력사를 담고있을뿐만아니라 옆에 새로 건설한 국도 215도 신중국의 거대한 성과와 이로 인한 천지개벽의 변화를 목격하고있다.